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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아, 핸드폰 두고 나왔다

오늘 아침 출근길, 차 안에서 남편과 떠드는 와중 남편이 내 손목을 갑자기 움켜쥐었다. "자기야, 애플 워치 어디 갔어? 핸드폰은?" 다시 돌아간다면 지각이었다. 업무에 전화가 꼭 필요한 것도, 오늘 퇴근 후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돌아갈 이유는 없다는 생각에 그냥 출근을 강행했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 하루를 보냈다. 남편에게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막상 지하철에 타고 나니 심심해서 오래전부터 가방에 넣어두기만 하고 잘 읽지 않았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모르는 단어를 발견했을 때는 용기 내서 옆에 있는 아주머니께 여쭤보기도 했다. 책장을 손으로 느끼고 다른 사람의 눈을 보며 도움을 받았던 그 25분이, 각종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의존해 흥미로운 포스트를 찾아 헤매며 보냈던 출퇴근 시간을 다 합친 것보다 알찼고, 그 공간 안에서 그리고 그 시간 동안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핸드폰 없는 하루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본인인증을 못 하거나 모르는 것을 바로바로 검색을 못 해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자꾸만 핸드폰으로 분산되는 집중력을 아껴서 얻는 이점이 더 많았다. 각종 앱에서 오는 "저를 잊으신 건 아니겠죠?" 따위의 불필요한 알람이 안 오다 보니, 사람들과의 대화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쉴 때는 말 그대로 머리를 비우고 쉴 수 있었다. 정말 좋았던 건 어쩐지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는 점이다. 위에 나열한 이유들 덕분일까?

문득 3개월 전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미국에서부터 찾아와 준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늘 안 좋은 일에서 파생되는 작은 기쁨들을 포착해냈고, It's a happy accident! 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오랜 비행시간과 시차 적응에 지쳤을 법도 한데, 사소한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즐기는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기분이 상하기 쉽지 않았다. 살면서 여러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기 마련인데 실수를 곱씹으며 괴로워하느니 바보 같은 실수를 한 나를 웃어넘기고 정말 중요한 일들에 집중하는 게 한 번 사는 인생 잘 즐기다 가는 게 아닐까 싶다.

아, 물론 모든 실수에 대해 관대하기만 한 책임감 없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종종 침대 머리맡에 핸드폰을 두고, 소탈하게 웃으며 출근을 강행하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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