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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을지로에서 만나요

**주의 : 자전거 타고 도로를 달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자동차 운전자들은 스트레스 받을 수 있습니다.

요즘 나는 성장 중이다. 그렇다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 사수님께서 큰 그림을 그려주시면 그 안의 내용을 채우는 일을 맡아왔다. 이번엔 내가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공부도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하다가 가끔 앞으로 나아가며 야근을 밥먹듯이 하고 있다. “남들은 더 쉽게 하겠지? 내가 느린 거겠지? 내가 잘하는 일이 이게 아니면 어떻게 하지?”와 같은 생각을 떨칠 수 없고 길을 잃은 느낌이다. 번아웃이 오고 있는 것 같아서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지막 남은 소중한 반차를 썼다. 원래 출근이 늦은 남편과 이야기도 하고 점심도 차려 먹으니 힘이 났다. 사람 없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여유 부리며 좋아하는 미드를 봤다. 완벽한 힐링이었다.

에어팟을 끼고 미드를 너무 열심히 본 탓일까, 내려야 할 역을 한 정거장 지나쳐버렸다. 지도 앱으로 계산해보니 되돌아가거나 지하철 환승해서 가는 것보다, 다음 정거장인 서울역에서 회사(을지로)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게 더 빠르다고 나왔다. 출근 시간이 아니므로 사람이 적으리라 생각해 서울역 15번 출구에서 따릉이를 대여했다. 바닥에 떨어진 가을 낙엽 위를 달리면서 마스크와 이마 위를 스치는 선선한 바람을 느끼니 오전 반차를 쓰고 따릉이를 대여한 내가 참 좋았다.

지도 앱과 내가 간과한 점이 있었는데, 서울역 주변 도로는 굉장히 복잡하며 자전거 운전자에게 그다지 친화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신나게 달리고 있던 나는 인도가 갑자기 끝이 나는 지점에 도달했다. (자전거 도로는 애초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6개의 우회전 전용 차선을 가로질러 좌회전차선으로 간 뒤(노란 화살표), 자동차 신호에 맞춰 좌회전(엄밀히 말하면 훅턴, 연두색 화살표)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버렸다.

당시의 상황

저 멀리 도로에 빨간불이 켜지고 내 쪽으로 오는 자동차들이 멈춰 서 있을 때 재빨리 좌회전 차선으로 달려갔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왼손을 파닥거리며 신호를 기다리는데 뒤에서 나는 자동차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버스가 멈춰 서 있었다. 대각선 뒤로는 오토바이가 한 대가 서 있었는데, 따릉이 위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가 가여웠는지 살짝 뒤에 서 있어 주었다. 오토바이 운전자의 (무언의) 응원을 받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신호가 바뀌자마자 최선을 다해 페달을 밟는 것뿐이었다. 긴장한 마음으로 따릉이 핸들을 꽉 쥐고 신호등을 노려봤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튀어 나갔고, 그리웠던 인도를 만나  잠시 자전거를 세울 수 있었다. 살았다! 안도하는 마음도 잠시, 출근중임이 떠올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죽지 않고 회사에 도착했다.

내가 일기를 열심히 썼다면 참 재미있는 시트콤 하나는 썼겠다고 아쉬워하다가 문득 그 시트콤의 마지막 화는 어떨까 궁금했다. 오늘처럼 남들이 가지 않는 이상한 길을 가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성공해 내고, 그 과정을 충분히 즐기면서 성장하다가 결국엔 행복하게 끝나지 않을까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니 지금은 좀 힘들지만 이 시기를 견뎌내고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차피 나는 이 시트콤의 주인공이고 시청자들의 응원을 받고 있으니(?), 묵묵히 페달을 밟다 보면 다같이 을지로에서 만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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